[허핑턴포스트]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
김누리/중앙대 교수·독문학
촛불혁명과 박근혜-최순실 사태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대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었다. 우리는 한국 민주주의의 놀라운 생명력에 경탄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지도 깨달았다.
촛불혁명으로 폭발한 한국 민주주의의 저력은 '역사적 기억'에서 나온 것이다.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10 민중항쟁의 역사는 시민들의 기억 속에 살아남아 그들을 거리로, 광장으로 나서게 한 힘이다. 발터 베냐민의 말처럼 "위기의 순간에 섬광처럼 번쩍이는 역사적 기억"이 광장의 유토피아를 만들어낸 것이다.
촛불혁명을 야기한 '박근혜 사태'는 동시에 한국 민주주의의 허약한 체질을 여실히 드러냈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진 '민주정부'가 곧 민주주의의 정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명박-박근혜로 계승된 '준파시즘 정권'의 야만적 행태가 일깨워주었다. 언론의 자유는 무너지고, 노동조합은 파괴되고, 인권은 짓밟히고, 교육은 어용화되고, 검찰과 국정원은 권력의 충견으로 전락한 현실은 '파시즘의 부활'을 방불케 했다. 확고한 줄 알았던 민주주의의 토대가 너무도 속절없이 무너졌다.
왜 위대한 민주혁명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주주의는 이리도 허약한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한국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최대 적은 약한 자아다"라는 아도르노의 유명한 명제는 한국 민주주의가 지닌 문제의 정곡을 찌른다. 약한 자아를 가진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온전히 뿌리내리기 어려운 것이다. 자아의 문제가 민주주의의 핵심문제라면, 이제 자신의 자아를 냉정하게 돌아볼 때다. '나는 얼마나 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는가.'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가정, 학교, 일터에서 '우리는 얼마나 민주주의자로 사는가'.
민주주의는 단순히 정치체제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다. 삼권분립과 대의민주주의를 신봉한다고 다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민주주의자는 어디서나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타인의 의사를 존중하고, 불의한 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강한 자아'를 가진 자다.
'민주주의의 최대 적이 약한 자아'라면, 한국 교육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최대 적이다. 학생의 자아를 철저히 약화시키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아가 강한 아이도 한국의 학교체제에 발을 딛는 순간 온전한 자아를 보존하기 어렵다. 학교는 학생들을 '존엄한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고 점수로 줄 세워 우열의 질서 속에 배치한다. 그럼으로써 한쪽에는 일상적인 모욕과 무시 속에서 열등감과 좌절감을 내면화한 '열등생'을 만들어내고, 다른 쪽에선 턱없는 우월감과 오만한 심성을 가진 '우등생'을 길러낸다. 이들은 모두 자아를 파괴하는 거대한 폭력기구의 희생자들이다. 열등생의 자아가 모멸감에 의해 손상된다면, 우등생의 자아는 오만함에 의해 왜곡된다.
'역사적 민주주의'가 '일상적 민주주의'로 착근하기 위해서는 강한 자아를 가진 민주주의자를 길러내야 한다. 한국 교육의 '최고 우등생' 우병우, 김기춘, 조윤선이 '민주주의의 적'이 된 이유는 자명하다. 한국 교육이 민주주의의 적이기 때문이다. 오만한 학습기계가 아니라 당당한 민주주의자를 키워낼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 '수월성 교육'에서 '민주 교육'으로의 대전환은 시대적 요청이다. 거기에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가 달려 있다. '교육혁명'이 차기 대통령의 첫번째 과제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http://www.huffingtonpost.kr/nury-kim/story_b_15630196.html?utm_id=naver 생각하게하는글이여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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