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
넷플릭스가 한국 서비스를 시작했다. 간단한 무료회원가입 및 결제 절차에 놀라는 이도 있고, 대량의 콘텐츠에 즐거워하는 이도 있으며, 양질의 화면이 제공되지 않아 실망하는 이도 있다. 이들을 부여잡기 위해 넷플리스가 망(網) 제공자들과 물밑에서 협상을 벌인다는 기사도 등장했다. 화질이 선명하든 않든,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열심히 콘텐츠들을 빈지와칭(binge-watching, 몰아보기)하고 있을 것이다. 많은 리스트들 중에서 무엇을 보면 좋을까를 내게 묻는 사람들에게, 유명한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가 목록에서 빠져있다고 투덜대는 사람들에게, 나는 마르코폴로(Marco Polo)를 권한다. 이번에 한국 서비스 목록을 보니 마르코 폴로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백안(百眼, 백 개의 눈, One Hundred Eyes)에 관한 못 보던 단편이 하나 더 보인다.
'동방견문록'의 저자라고 학창시절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그 마르코 폴로다. 드라마 속에선 차이나(China)가 등장하지만 한족(漢族)이 주인공이 아니다. 남송(南宋)이라는 이름으로 중심부에서 쫓겨간 한족이 가장 약하던 시기이고, 쿠빌라이 '칸'의 시대다. 중국시장을 겨냥한 드라마인듯 싶지만, 묘하게 중국을 '디스'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색목인(色目人)을 주인공으로 삼으면 반감을 살까봐 마르코 폴로에게 관찰자(observer)의 지위도 부여해 슬쩍 비켜나고 있다. 광활한 초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웅장한 장면들을 보면서 여러 번 깜짝 놀라고 감탄했다.
그리고 또 우울해지기도 했다. 작년 광고총량제의 실시가 방송가의 화제이던 시절, 언론은 고작 정책의 효과가 300억밖에 안 된다면서 비판했다. 3으로 나눠 지상파 3사가 가져가면 고작 100억원의 효과밖에 없는데, 무리해서 제도를 추진한다는 비판이었다. 공청회에서 패널로 나온 방송사의 누군가가 했던 이야기는 잊을 수 없다. "저희가요. 그 100억원이 있으면, 대하 사극을 시리즈로 3편은 제작할 수 있어요. 그러면 다시 대장금 이후의 한류의 불을 지필 수 있어요. 작은 금액이 아니에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마르코 폴로의 제작비가 떠올라 우울해졌다. 10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1시즌의 마르코폴로의 총 제작비는 1000억원. 에피소드 한 개의 제작비가 100억원이다.
2.
아는 만큼 보인다. '이슬람 문명의 모험 - 몽골의 침략과 그 이후'라는 글을 읽고 나면, 드라마 '마르코 폴로'가 훨씬 더 정교하게 시청자층을 타게팅(targeting)하여 만들어졌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거대 인구의 중국 시장을 노크하고 또 이어서 '칸'에 대하여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이슬람 시장을 노크하는 것이다(독일의 나치와 일본의 군국주의를 연상시키는 광고로 물의를 일으키면서 또한 나치와 일본의 상흔을 가진 여러 나라들의 '어그로'를 끌었던 아마존의 TV 드라마 'The Man in the High Castle' 또한 이런 식으로 글로벌 시장의 시청자층과 시청자 지역을 동시 저울질 하고 있는 듯 싶다). 이미 마르코 폴로 시즌1은 이어질 시즌2의 중심 서사 구도에서 이슬람이 빗겨 갈 수 없음을 암시하며 끝을 맺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미 주의를 환기시켜둔 중국시장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 시즌1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캐릭터 하나의 외전(外傳)을 만들어 안겨주면 된다. 그래서 백안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백안(百眼)은 마르코 폴로에 등장하는, 궁금증을 유발하는 한족 맹인(盲人) 무사이자 무술교사다. 스페셜 에디션을 보니 아마도 극중 설정상으로는 무당파 소속인 듯싶다. 태극권의 움직임이 당랑권보다 더 화려하고 멋있지 않았다면, 스페셜 에디션의 주인공은 백안이 아니라 극중 사망한 남송 재상 가사도(賈似道)의 프리퀄(Prequel)이었을지도 모른다.
최근 개봉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헤이트풀8'은 러닝타임이 2시간 47분이다. 며칠 전 골든 글로브의 트로피를 받은 디카프리오의 영화 '레버넌트'는 2시간 36분이다. 흥행에 성공한 여세를 몰아 장시간의 감독판까지도 개봉한 영화 '내부자들 : 디 오리지널'은 3시간이다. 영화와 드라마의 차이에 대하여 직관적으로 대답하자면, 1시간 내외로 짧게 TV에서 여러 편을 며칠에 걸쳐 보는 것이 드라마이고, 2시간 전후로 길게 극장에서 하루 만에 한 편을 보는 것이 영화라 답하면 된다. 그런데, 극장이 아닌 곳에서 심지어는 이동 중에도 N스크린으로 끊임없이(seamlessly) 영상 콘텐츠를 소비하고 또 방대한 스토리텔링을 10시간 동안 집에서 겪고 있다면, 영화는 무엇이고 드라마는 무엇일까 새삼 의문을 갖게 된다.
3.
그간 빈지와칭(binge-watching)은 잘 설계된 사용자경험(UX)이라 나는 생각했다. '넷플릭스'라는 회사/매체/플랫폼에 집중적으로 노출되고 부대끼게 만들어 결국 익숙하고 친숙하게 만드는 사용자경험을 영리하게 제공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는 게임에서 익숙한 패턴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새로운 확장팩을 설치한다, 시나리오 모드로 플레이한다, 익숙해진다, 대전모드로 진입하여 친구들과 함께 래더(ladder) 모드로 경쟁한다. 예전에 봤던 드라마의 다음 시즌이 릴리스되었다, 빈지와칭한다, 한 에피소드를 시청하고 다음 에피소드를 플레이할 때마다 자신의 SNS에 '한 편 감상 완료. 다음 편 감상 시작!'를 외친다, 같은 해시태그를 사용하면서 모르는 사람들과 드라마를 보면서 실시간 SNS 토론을 한다. 바야흐로 드라마와 게임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드라마가 완결되어도 끝이 아니다. 스토리를 이어서 다음 시즌이 곧 개봉된다. 이제 드라마는 한 번 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시즌 별로 기다렸다가 꾸준히 시청하는 것으로 변하고 있다. 드라마, 영화, 게임이 실은 비슷한 속성임을 다시 깨닫게 된다. 한 게임을 버전업해서 시리즈로 내거나 확장팩 패치를 해대던 블리자드가 워크래프트(Warcraft), 디아블로(Diablo), 와우(WoW), 스타크래프트(Starcraft)의 캐릭터들을 하스스톤(Hearthstone), 히어로즈오브더스톰(Heroes of the Storm) 등의 게임들에로 순환출연시키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소비자'를 붙드는 생태'계'이다.
이제 시리즈를 묶어 보는 빈지와칭은 사람들의 성향을 변하게 한다. 비슷한 시각(時刻)에 비슷한 시각(視角)으로 전염된다. 수년에 걸쳐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는 어쨌든 아주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주 과거를 회상하고 추억하게 만드는 사용자경험을 만드는데 끝내 성공했다(높은 시청율과 다양성의 훼손은 묶어서 이야기할 많은 점들이 있다). 실시간 피드백을 받아 '쪽대본'은 더욱 정교하게 시청자층의 면면을 겨냥하여 완성된다. 심지어는 에피소드가 아닌 시즌 전체가 파일럿이라 보는 사람도 있다. '스트리밍 TV는 시청의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장르다'라는 그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어느 에피소드에서 어느 캐릭터에 좀 더 오래 머무르는지, 소셜미디어에서 어떻게 그 평이 오고가는지를 분석하여 다음 시리즈에서 그 캐릭터는 보강하고 풍성하게 만든다. 그렇게 보강된 캐릭터는 자신만의 외전(外傳)을 만들어 새로운 이야기의 구심점이 된다. 결국 빈지와칭은 시간과 공간을 왜곡하여 버린다. 여러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몰아보기를 하면, 잘 설계된 감정선과 스토리라인을 동시에 소비하고 겪게 된다. 비슷하게 분노하고 비슷하게 슬퍼하며 비슷하게 흐뭇해하게 된다. 예를 들어, 다가오는 3월 3일 전세계 곳곳의 많은 사람들이 하우스 오브 카드 시즌 4를 몰아보기 하면서 '정치'를 떠올리고 '아메리카'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백 개의 눈으로 몰아보기'는 긍정적으로는 유사감정의 동시 소비로, 부정적으로는 목표인식의 간접 조종으로 다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싶다. 바보상자를 탈출하려던 사람들은 이제 조삼모사(朝三暮四) 속의 원숭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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