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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많은 시간을 두고 고민했던 일들이 사실은 별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더 고민하기도 했다. 아니 고민하는 척을 했던 걸지도 모른다. 이미 마음속에서 답을 내려졌고, 정해진 방향으로 걸어가야 하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뒤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사실 그렇게 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것을 나에게 요구했으며 나는 그 요구에 응해야 했다. 반대로 나도 그랬다. 나도 그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으며, 대부분은 내 기대를 벗어났다. 나는 그들이 내게 무관심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완벽한 무관심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내보이는 나의 모습을 포장하고 가꿨다. 그러나 대부분은 나의 멋부림을 알아채지 못했다. 내가 자랑하고 싶은 것은 무시했고, 내가 감추고 싶은 것은 기가 막히게 찾아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감추고 싶은 것을 찾아낼 때, 묘하게도 내가 모멸감을 느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그들은 내가 그것을 자랑스러워할 거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왜냐면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상당한 시간을 투자했다. 옳고 그른 것을 골라내는 문제라기보다는 기준점을 어디에 두어야 모두가 만족할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했던 거 같다. 세상은 역사로 남고 우리는 역사로 세상을 공부했다. 그러나 있어지는 세상은 역사와 판박이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판박이가 아니라고 하기엔 굉장히 유사하게 반복된다. 나는 과거 하륜이라는 사람의 일대기를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어디에서든 빛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처세술이었으며, 시대를 관통할 만한 통찰, 아니 권력을 쥘 수 있는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놀라운 통찰력에 감탄한 것은 맞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읽었던 세상에 대해서 한탄을 금치 못했었다. 물고 뜯기는 약육강식의 세상은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인터넷에서 있어지는 대중의 흐름이 매우 중요하다. 오프라인에서 힘을 갖는 사람들은 온라인에서의 흐름을 쥐려고 한다. 온라인에서 무분별하게 퍼져가는 소문은 진위 여부와는 상관없이 얼마나 더 자극적일 수 있는지를 겨루는 것 같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현재의 온라인상의 정보는 필터링이 필요해 보인다. RSS를 활용하여 좋은 정보를 공유해주는 전문성 넘치는 블로그의 피드를 열람했었다. 마음에 드는 기자가 있으면 그 기자의 글을 받아서 보기도 했다. 해외 블로거들의 글을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찾아서 보는 것이 귀찮아지기 시작했고, 강제적으로 주입될 수밖에 없는 포탈 메인의 정보들에 눈길이 쏠리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주어진 정보를 처리하기 바빠진 나에게 실망을 하게 되었고, 몇몇 커뮤니티의 정보들을 열람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내가 추구하는 정치관이나 가치관이 비슷한 인간들의 집단에서 그들이 나누는 정보들을 토대로 세상을 읽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는 있었다. 온라인상의 커뮤니티는 열려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당히 폐쇄적이다. 그 안에서도 네임드라고 불리는 몇몇 사람의 사상과 암묵적인 규칙으로 흐름이 만들어진다.
어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만 그 누구가 좋은 사람인지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알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의 저서나 그의 연설, 그가 만든 콘텐츠를 통해서 만이 알게 될 텐데, 생각보다 그것을 접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미디어를 제공하는 시장은 굉장히 좁고 협착하며, 트렌드를 읽지 못하면 처참하게 무너지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트렌드는 강제적으로 문을 열어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게 할 수 있는데 대부분 그런 건 머니파워에서부터 온다. 대형 영화 배급사가 만드는 천만 영화가 그 예라고 볼 수 있다. 대형서점이나 대형 출판사가 밀어주는 베스트셀러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분야에서 이런 현상들은 나타난다. 나 역시 비슷한 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데, 나는 어릴 적에 돈이 없어서 야구를 그만둔 적이 있다. 선수 생활을 하고 싶어서 리틀 야구단에 입단했었는데, 금전적인 문제로 그만두게 되었다. 그 뒤로 야구 경기를 안 본다. 아마도 우리 집에 돈이 많았다면 내 실력은 뒤로하고 꽤 오랜 시간 야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힘이 있다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고, 생각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나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사실 가장 큰 고민 중에 하나였다. 세상에 무언가를 제시하고 나란 인간의 삶을 쫓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능할까. 수많은 위인들이 남겼던 것들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문득 한 가지 알 수 있었던 건 그들이 남긴 결과였다. 결과를 남기지 못했다면 어떤 훌륭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쉽사리 기억될 수 없었다. 그럼 나는 결과를 남길 수 있을까. 어떤 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얻어내야만 하는 것인가. 그러다가 문득 나의 변변찮은 능력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확신할 수 있었다.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며 살았던 나였지만 어쩐지 세상 앞에서는 작아진다. 그 이유는 세상이 제시하는 기준치를 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매 순간 노력하고 나아가려고 하지만 어딘가 부족한 내 모습은 더 잘 보이게 된다. 수차례 반복되었던 좌절의 순간들은 회복되기도 전에 또 다른 좌절로 이전의 좌절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이런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에서부터는 좌절을 쉽게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데, 나는 이 순간을 '초연의 시작'이라고 불렀다. 사실 나는 내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것과 삶에 대한 강력한 집착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내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는 몇 마디 문장으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나는 그러하다. 그러나 간혹 나의 이 노력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 순간이 유일하게 초연하지 못하는 시간이 된다.
나는 내가 세운 내 삶의 원칙과 나의 생각을 구현시키는 것을 원한다. 그러나 나는 힘이 없고, 매우 나약한 존재였다. 10여 년의 시간 동안 일을 하면서 구현시켜낸 일도 있었고, 그러지 못했던 일도 있었고, 내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고 인정하는 순간도 있었다. 수많은 설득의 시간과 토론의 시간이 있었으며, 지시를 받기도 하고 지시를 하기도 했다. 오고 가는 수많은 언어와 문장 속에서 나는 나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노력했었다. 누군가는 내 생각에 지지를 했고, 누군가는 내 생각에 반하는 입장에 섰다. 지지하는 사람이나 반하는 사람이나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내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내 생각에 반하지 않으면서, 나를 지지하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들이 나를 지지하는 이유가 무얼까 생각해봤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내 몸에 꽂힌 빨대였다. 그들은 나에게 필요한 것이 있었고, 그것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나를 지지하는 척했던 것뿐이었다. 애초부터 내 생각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그저 내가 가진 지위나 능력 따위가 필요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을 만났다. 하고 있는 업의 특성상 많은 사람을 대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보는 그들의 표정이 바뀌는 순간은 내가 그들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을 때였다. 사람은 사람을 잘 모른다. 아니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필요에 의해 원하고 원치 않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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